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최후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창세기에서 던진 질문들을 요한계시록에서 대답하면서 성경 66권을 종결 짓게 됩니다.
하지만 계시록은 결코 만만한 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난해한 상징과 숫자와 표현이 너무 많아서 자칫 잘못 해석하면 치명적인 신학적인 오류를 범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자신들이 멋대로 해석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서인지 “요한계시록”하면 성도들도 “어렵다거나,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엄연한 성경 66권 중에 하나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결론을 내어주는 마지막 책이라 굉장히 중요하고 소중한 책입니다.
흔히들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이 우리들에게 “세상이 어떻게 종말이 이루어질 것인가?”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라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쓰여진 이유는 독자들이였던, 당시 1세기 말의 소아시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로마의 박해를 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이 앞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많은 상징들과 가르침들은 기본적으로 그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을 반영하는 것이며, 일차적으로 당시의 교회에 주는 희망의 메시지 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의 상황 속에서 요한이 어떤 의미로 썼는지를 먼저 이해하고, 현재의 우리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분별하게 현재의 상황을 적용하면, 심각한 해석상의 오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도미티아 황제의 제위 기간 중인 AD95년경에 씌여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저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입니다.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서는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황제숭배가 굉장히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이들 지방에 존재하던 헬라종교들과 더불어서 황제숭배는 모든 시민들에게 동일하게 요구되는 시민적 의무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도시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고발당하여, 많은 고통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심하면 처형을 당할 수 있는 그런 위급한 상황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교회가 누렸던 종교적 자유는 유대인들의 고발로 점점 교회는 더 어려움에 빠지고있을 그 상황, 교회는 유대교와 구분되는 새로운 종교로서 만약 황제숭배와 기타 종교적 제사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모든 부분에서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당시 도시들에서 경제활동을 하려면 각종 동종직업 조합이라는 trade guild에 가입해야 했고, 각 조합들은 자신들의 우상들을 그들이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숭배하고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우상숭배를 거부할 경우에 이들은 경제활동에서 제외되고 큰 벌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 중에서 타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황제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하여 제물과 기도를 바치고, 그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마음속으로는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황제숭배에 참여하여 박해를 모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들은 완전히 배교하여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앙을 잘 지킨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신앙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 회당에 가입함으로써, 종교적인 보장도 받고, 계속해서 경제활동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도요한은 신앙을 저버리고 배교하지 말고, 황제숭배와 각종 우상숭배에 참여하지도 말고, 경제활동에서 제외되어 가난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키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도와 함께 이제 영원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임을 강력하게 권고함으로 이들이 끝까지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쓴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술한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현재와 장래의 있을 일들이 계속해서 여러 겹으로 반복되어 설명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일이란, 당시에 교회가 경험하는 바이며, 장래의 일이란 미래의 종말의 때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또한 일곱 교회를 넘어서서 다른 독자들을 염두헤서 일곱 교회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래서 반복구인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7, 11, 17, 29; 3.6, 13, 22)라는 말이 이 편지에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1세기 또는 21세기의 교회들도 자기 자신들의 상황에 관계있는 메시지를 그 가운데 찾을 수 있으며, 그래서 요한계시록 전체는 21세기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권력과 형상들과 이방종교의 영광의 형상들에 대해여 계시록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정반대의 상징으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문명을 의인화한 여신, 로마의 비전은 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의 신전에서 숭배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이 창녀, 음란한 음녀, 꾀쓰는 마녀에 불과함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또 음녀는 여왕 이세벨에 대한 성경적인 뉘앙스는 그러한 인상을 강화해주는 그런 상징물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볼 때에 정치 풍자만화와 같이 생각하면 쉽습니다. 상징과 비유를 많이 써서 그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의 신학적 강조점은 다섯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의 싸움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결국 승리하신다.” 바로 이런 메시지 입니다.
두 번째 강조점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예수님의 증인들은 옳다고 여기심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갈 것이다.”를 강조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 위에서 일시적으로 고난당하고,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은 최후의 승리와 하나님의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
또 네 번째 강조점은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고, 교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에 의하여 지속되고 유지된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신학적 강조점은 이 땅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영원한 천국의 백성인 바로 새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천국에서 영원히 살 새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여러분 은혜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